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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역사 관련

한국전쟁 전개 - 1(전쟁 초기부터 인천 상륙작전까지)

by minchel1128 2021. 12. 25.

아래 내용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6.25 전쟁 주요 전투를 참조하여 작성하였습니다.

괄호 안의 지역 이름은 현재 사용하는 지명입니다.

38도선 초기 전투

38도선 초기 전투는 서부부터 옹진반도, 개성-문산 지역, 중서부의 동두천-포천-의정부 지역, 중동부의 춘천-홍천, 동부의 동해안 지역서 발생하게 된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은 야포를 이용해 전선을 공격하기 시작하였고 북한군 기동부대가 38도선을 넘어 진격을 시작한다. 또한 북한군 제766부대와 제945부대가 동해안의 정동진(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정동진리)과 임원진(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임원리) 북한군의 첫 번째 목표로는 강원도 지역을 우선적으로 장악해 국군이 서울 등의 수도권을 배치되어 방어하는 동안 강원도에서 경기도 수원으로 이동한 뒤 해당 일대를 장악하여 국군의 후퇴로를 차단해 포위 섬멸하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북한은 제1군단을 경기도 연천과 운천(경기도 포천시 영북면 운천리)에서 경기도 의정부까지 이르는 방향과 개성에서 문산(경기도 파주시 문산읍)으로 이어지는 접근로에 집중했고 2군단을 강원도 춘천과 강원도 강릉 북쪽으로 공격을 개시한다. 북한군 제2군단의 3개의 사단은 강원도 화천-강원도 춘천 지역, 강원도 인제-강원도 홍천 지역, 동해안 지역 3개의 방향으로 공격을 진행하게 된다.

북한군은 당시에 한국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과 무기를 가지고 있어 높은 수준의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불리한 방어지역과 빈약한 방어 진지, 열세한 병력과 장비를 가지고 있는 국군을 손쉽게 돌파할 수 있었다. 황해도의 옹진반도(남북 분단 이후 경기도에 편입되어 있었습니다.)에서는 3개의 대대가 배치되어있었으며 2개의 대대는 38도선에 배치하고 1개는 예비로 배치되어있었으며 45km의 방어를 담당하며 종심지역까지 7~8k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는 구조였다. 북한군 제1연대와 제3경비여단은 옹진반도를 조기에 장악한 다음 연백-개성-문산 방면으로 서울 공격을 증원하겠다는 계획 아래에 6월 23일부터 병력과 차량을 공격대기 지점에 이동하였고 6월 25일 새벽 4시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한다. 옹진반도를 방어하던 국군 제17연대는 오전 7시에 예비대까지 투입하여 방어를 하고자 하였으나 북한군이 대대 간의 전투 지경 선인 취야(황해남도 벽성군 벽성읍(구 황해도 벽성군 가좌면 취야리))-양원(황해남도 옹진군 원사리), 취야-강령(황해남도 강령군 강령읍(구 황해도 옹진군 부민면 강령리)) 국도를 통해 제1연대를 공격해 국군의 방어지역은 동서로 분리되어 버렸고 주저항선이 동서로 분리되자 지연전으로 변경하였고 연대본부와 직할대 및 제3대대는 부포항(황해남도 강령군 부포노동자구 당시 경기도 옹진군)에서 26일 오전 해군 함정을 이용해 철수했고 제1,2대대와 연대 직할대 낙오병들은 사곶항(황해남도 옹진군 남해노동자구(구 황해도 옹진군 남면 사곶리))에서 민간선박을 이용해 철수하였습니다. 철수한 병력들은 27일과 28일 사이에 경기도 인천(인천광역시)에 상륙하였고 이후 경기도 수원에 집결해 육군 본부의 예비병력으로 재편성된다.
개성(개성직할시)-문산(경기도 파주시 문산읍)-서울 접근로는 국군 제1사단이 청단(황해남도 청단군 청단읍)에서 고랑포(경기도 연천군 장남면)까지 약 94km의 넓은 범위에서 방어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고 제1사단은 12 연대와 13 연대를 전방에 배치했고 11 연대가 경기도 수색(서울특별시 은평구 수색동) 지역에서 교육 훈련 중이었으며 제1사단은 임진강 남안을 주 진지로 정하고 예성강(황해북도 개풍군 남포리(구 경기도 개성군 하남면)) 철교와 임진교(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방어 및 파괴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하지만 국군 1사단 방어 지역으로 북한군 제203 전차 연대의 지원을 받는 제1사단과 제6사단이 공격해 왔고 제1사단은 25일 오전 4시~4시 30분 시점에 국군 제13연대와 교전을 들어갔고 북한군 제6사단은 좌측 연백 지구의 제12연대와 교전을 하였으며 이로 인해 38도선에 배치되어있던 부대들은 각개 격파되어버렸고 이에 국군 1사단은 후퇴한 부대들을 임진강 남쪽 주 저항선에 배치하였고 예비 연대인 제11연대를 수색훈련에서 문산지구 방어로 임무를 전환하여 임진강 철교를 건너 철수하면 철교를 폭파하라고 지시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명령 전달 과정의 혼란과 기술 부족으로 철교가 폭파되지 못했고 국군 1사단은 문산 북쪽의 임진강변과 적성(경기도 파주시 적성면)-덕현리(경기도 가평군 상면)-장파리(경기도 파주시 파평면)를 연결하는 파평산(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전방에서 공방전을 전개하게 된다.

북한군은 6월 26일 폭파되지 못한 임진강 철교를 통해 5대의 전차를 선두로 보병, 전차, 포병의 협동으로 일제히 공격을 진행해 제13 연대의 동편 측면으로 우회 공격을 진행하였고 국군 제11연대는 문산 남쪽 구릉지대에서 일시적으로 철수했다가 반격해 주 진지를 회복했으나 제13연대의 파평산 주저항선이 무너짐으로써 북한군은 금곡리(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금곡리) 방면으로 진출하게 된다. 

27일 봉일천 북쪽의 위전리(경기도 파주시 월롱면 위전리)-도내리(경기도 파주시 월룽면 도내리)를 연결하는 최후 저항선으로 주력을 이동 완료한 국군 제1사단은 제13연대와 증원된 제15연대를 전방에 배치하고 제11연대를 예비로 하여 문산-서울 간 국도를 중심으로 종심 배치하고 서울 방어를 위한 최후의 보루로 정하고 28일 오전까지 북한군과 치열한 공방전에 들어가게 된다.

한편 중서부 지역의 경우에서는 북한군의 경기도 의정부 북방을 방어하던 국군 제7사단에 북한군 제3사단이 운천(경기도 포천시 영북면)에서 포천으로 북한군 제4사단이 연천에서 동두천 방향으로 제109 전차 연대와 제107 전차 연대와 협동하여 남하하였고 북한군 제1군단은 동두천 방향에 제4사단과 1개 전차대대를 포천 방향에 제3사단과 제105 전차 여단을 각각 투입해 제13, 제15사단을 제2제대로 운용한다. 전차 연대의 지원으로 해당 지역의 북한군 공격 부대는 국군보다 병력은 7배 화력은 18배 우세하게 공격을 진행한다.

국군 제7사단은 적성(경기도 파주시 적성면)에서 사직리(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사직리)까지의 47km 정면을 방어하였고 제1연대가 동두천 정면을 제9연대가 포천 정면을 담당하였다. 각 연대는 1개 대대를 38도선 경계임무에 투입하고 주력을 교육훈련 중이었으며 국군 제7사단은 예하의 제3연대가 수도경비사령부로 예속 변경되고 온양의 제3사단 제25연대가 편입되도록 하였지만 제3사단의 제25연대가 도착하지 않아 사단 예비를 보유하지 못한 상태일 때 공격을 받게 된다.

북한군의 공격에 국군 제7사단은 전방에 배치된 경계부대로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도록 하였고 의정부에서 교육훈련 중이던 제1연대와 제9연대를 북한군 접근로의 주 진지인 감악산(경기도 파주시 적성면)-마차산(경기도 동두천시 안흥동)-소요산(경기도 동두천시 상봉암동)-가랑산(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천주산(경기도 포천시 신북면)을 연결하는 주 저항선에 배치하기 위해 준비되었다.

동두천 북방 제1연대에 북한군 제4사단은 전곡(경기도 연천군 전곡읍)-초성리(경기도 연천군 청산면)-동두천 방향에 전차 2개 대대로 증강된 제16연대를 주력으로 투입하고 서쪽의 적암(경기도 파주시 적성면)-봉암리(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방향에 제18연대를 조공으로 투입하여 병진 공격하였고 이들은 전곡에서 한탄강을 건너 국군 제1연대의 38도선 경계 진지를 돌파하고 초성리를 거쳐 동두천 방향으로 진출하게 되었고 국군 제1연대의 주력은 소요산 일대 주 저항선에 배치되게 된다.

국군 제1연대는 정오 무렵에 북한군 제16연대의 공격을 저지하였지만 오후 3시경에 북한군 제4사단의 추가 공격으로 소요산 일대 주저항선에서 철수해야 되었고 해질 무렵 북한군이 동두천 시내에 진입하는데 허용했고 결국 국군 제1연대는 밤 10경 덕정(경기도 양주시 덕정동) 지역으로 철수하였으나 제1연대의 38도선 경계부대였던 제2대대는 본대와 합류하지 못하고 평촌(경기도 포천시 동교동)을 거쳐 퇴계원(경기도 남양주시 퇴계원읍)으로 철수하게 된다. 

포천을 방어하던 제9 연대 지역에서는 북한군 제3사단에 배속된 기계화 부대가 오전 11시에 포천 근처에 진입하였고 전차의 엄호 아래에 보병부대 주력이 오후 2시 천주산과 가랑산을 연결하는 연대의 주 저항선을 돌파하여 오후 4시경 포천 읍내에 진입하게 된다. 국군 제9 연대는 주 저항선이 조기에 붕괴되자 야간을 이용해 광릉(경기도 남양주 진접읍)으로 철수하고 다음날 태릉(서울특별시 노원구)까지 철수하게 되지만 9 연대 제3대대는 통신 두절로 인해 철수 명령을 받지 못했고 진지를 지키다 철수 시기를 놓쳐 큰 피해를 입고 제1연대 지역인 덕정(경기도 양주) 부근으로 철수하게 된다.

북한군 제3사단이 25일 오전에 포천을 장악하고 같은 날 저녁 제4사단이 동두천 시내에 진입함으로써 의정부를 압박하게 되었고 육군 본부는 서울 부근에 주둔한 부대와 대전의 국군 제2사단과 대구의 제3사단, 광주의 제5사단을 의정부로 긴급 투입해 서울 방어를 시도하였지만 서울에 도착한 단위 부대들은 본대와 합류하지 못해 전투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국군 제7사단은 26일 아침에 제1연대와 증원된 제18연대를 역습에 투입해 동두천을 탈환하였지만 2사단의 포천 공격이 실패하고 북한군 제3사단에 의해 의정부가 함락되면서 동두천에 진입한 부대의 퇴로가 차단되었고 이에 제1연대는 창동(서울특별시 도봉구)으로 제18연대는 고양을 경유해 김포반도로 철수하게 된다.

그리고 중동부 지역에서는 국군 제6사단이 제7연대를 춘천에 제2연대를 홍천 북동쪽에 배치하고 제19연대를 예지로 원주에 주둔하고 있었고 사단은 적목리(경기도 가평군 북면)에서 진흑동(강원도 인제군 기린면)까지 84km 지역을 방어하고 있었다.

북한군은 강원도의 국군 방어를 빠르게 돌파해 국군이 서울을 방어하는 틈을 타서 수원을 우회하여 장악해 서울 지역의 부대의 퇴로와 서울 방어를 위한 증원을 막을 계획으로 제2군단을 투입하게 된다. 화천-춘천 방향에 제2사단이 공격을 진행하였고 인제-홍천 방향엔 제12사단과 고속 기동 부대인 제603 모터사이클 연대가 투입되었으며 제5사단을 제2제대로 운용해 국군보다 4배의 병력과 10배의 화력으로 공격을 진행하게 된다.

화천-춘천 지역의 국군 제7연대는 화천-춘천 방면에 1개 대대를 양구-춘천 지역에 1개 대대, 화천-가평 간 접근로에 2개 중대를 배치해 방어를 진행하였고 북한군은 제2사단으로 춘천과 가평을 점령한 후 서울 동남쪽으로 진출한다는 계획에 따라 3개의 보병연대와 1개의 포병연대를 화천-춘천, 화천-가평 지역에 투입해 공격을 진행한다.

화천-춘천 간 도로에 있는 모진교(현재는 소양강댐 공사로 수몰)는 북한군 기계화 부대가 북한강을 건너 춘천으로 들어오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되는 교량이었지만 국군은 해당 다리 폭파에 실패하였고 북한군은 자주대전차포를 내세우며 공격을 진행한다. 이로 인해 38도선 경계 진지에서 철수해 소양강 북안 164 고지와 우두산(강원도 춘천시 우두동) 일대에 주저항선을 구축하였고 소양강을 도하해 춘천으로 이동하던 북한군은 개활지에 노출된 채로 정면 공격을 반복하다 국군 제6사단 제16포병대대에 의해 큰 피해를 입게 되었고 개전 첫날 춘천을 점령하려던 계획에 실패하게 된다.

다음날 원주에 주둔하던 국군 제19연대가 춘천지역으로 증원되었고 이로 인해 국군 제6사단의 주력이 해당 지역을 방어를 진행하게 되었으며 사단은 소양강변 및 봉의산(강원도 춘천시 소양로 1가) 일대에 예비 진지를 편성하고 6월 27일까지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한 후 춘천 외곽의 원창고개(강원도 춘천시 동산면) 일대에 방어선을 편성하였고 화천-가평 지역의 제3 대대도 고수령과 홍적령(강원도 춘천시 사북면)에서 북한군을 저지한 후 6월 27일 금곡(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철수하였다.

홍천 북방의 국군 제2연대에는 북한군 제12사단이 자주대전차포를 가지고 공격을 진행하였고 제2군단의 제12사단은 국군의 퇴로와 증원을 차단하기 위해 인제-홍천으로 진출해 홍천을 장악하고 홍천-여주 방면으로 진격하는 계획을 세웠다.

북한군 제12사단의 공격을 받은 국군 제2연대는 38도선 경계 진지에서 철수하여 어론리(강원도 인제군 남면) 일대에 주저항선을 구축하고 북한군 남진을 저지하였으며 자은리(강원도 홍천군 두촌면)를 거쳐 말고개(강원도 춘천시 사북면) 일대에 최후 저항선을 구축하였다. 이후 북한군 제12사단은 4차례의 총공격을 하였지만 제2연대는 방어에 성공하였고 지연전을 펼치면서 홍천으로 철수하게 된다. 인제-현리 지역의 국군 제2연대 제3 대대도 하답(강원도 인제군 기린면)-운니산에 이르는 38도선 경계 진지에서 북한군과 교전한 후 철수하여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에서 본대와 합류한다.

해당 지역(춘천-홍천) 전투에서 대전차포와 수류탄으로 북한군의 자주 대전차포 10여 대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고 3일 동안 춘천과 홍천 지역에서 북한군을 상대로 방어에 성공함에 따라 북한군은 수원으로 진출하는데 차질을 빚게 되었고 국군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한강방어선을 형성하는 시간적 여유를 가지게 된다.

동해안 지역을 방어하던 국군 제8사단은 제10 연대를 38도선에 배치하고 제21연대를 예비로 삼척에 집결 보유하고 있었고 제6사단의 협조점인 진흑동(강원도 인제군 기린면)에서 동해안 기사문리(강원도 고성군)까지 26km 구간으로 유사시 제21연대를 전방에 투입해 38도선에서 저지하여 강릉을 고수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6월 중순에 북한의 무장 유격대가 침투해와 이를 토벌하기 위해 각 연대에서 1개 대대씩 2개 대대를 차출해 오대산과 계방산 일대에 투입해 북한군 전면 공격에 가용병력이 4개 대대로 축소하게 된다.

북한군 제5사단 제10 연대를 제1경비여단에 배속시켜 주력으로 동해가도 북쪽에서 국군 제10 연대를 공격하게 하고 강릉 남쪽 정동진(강원도 강릉시 강동면)과 임원진(강원도 삼척시 원덕읍)에 상륙한 제945육전대와 제766부대로 국군 제21연대의 증원을 차단하는 가운데 일부 병력을 북상시켜 강릉 북쪽 연곡천 일대에서 국군 제10 연대를 협공하며 일부 병력은 산악지대로 보내 퇴로를 차단하고자 하였다. 

제1경비여단은 6월 25일 새벽에 공격 준비 사격과 동시에 38도선을 돌파해 주력 공격 부대가 주문진(강원도 강릉시 주문진읍)으로 공격을 개시하였고 보조 공격 부대가 장리(강원도 양양군 현북면)와 서림리(강원도 양양군 서면)의 계곡 접근로를 따라 남하하였으며 인제 방면에서 제1경비여단의 경보병 4개 대대가 내린천(강원도 인제군 기린면)을 따라 이동하였다. 결국 국군 제6사단 제10 연대는 화상천(강원도 양양군 현남면)에서 주 저항선인 연곡천(강원도 강릉시 연곡면)으로 철수하였고 21 연대는 분산 배치되어있던 병력을 규합해 북한군 상륙부대 격멸과 전방 방어부대 증원을 위해 북상하게 된다. 국군 제8사단은 북한의 제1경비여단과 동해안 상륙부대에 의해 남북 협공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자 제21연대의 일부 병력을 안인리-언별리를 연결하는 군선천 선에 투입해 북한군 상륙부대의 공격을 저지하였고 연곡천과 사천(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일대에서 27일까지 강릉을 사수해 북한군의 초기 전투 작전계획에 큰 차질을 주었으며 주민들을 대피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27일 대관령(강원도 평창군 대관령)으로 철수한 국군 제8사단은 강릉 탈환을 목표로 반격을 감행하여 강릉 부근까지 진출하던 도중 다른 사단과의 전선 균형을 위해 하달된 육군본부 철수 명령에 따라 반격을 중단하고 대관령으로 복귀한 후 대화(강원도 평창군 대화면)를 거쳐 충청북도 제천으로 이동한다.

6.25 전쟁 첫날은 대한민국에서는 국가정책 차원에서의 유사시에 대비한 실질적인 비상계획과 구상, 체계화된 안보정책 모두 없었으며 북한군 남침 준비에 대한 조기경보체제도 미흡하였다. 또한 북한군의 대대적인 남침에도 전 전선에 걸친 전면 남침이라는 사실 파악조차 지연(대대적인 공격 시작은 새벽 4시이지만 육군 본부가 남침을 인지한 시각은 오전 11시쯤입니다.)되어 많은 혼란을 야기하였고 주요 지휘관들 또한 자리에 없어 큰 피해를 입게 되었으며 장비와 병력 부족으로 중서부 지역의 전선이 붕괴되었고 이는 서울이 3일 만에 함락되는 결과까지 발생하게 되었다. 다만 현장 지휘관들을 좋은 지휘력으로 인해 북한군의 기습에도 중동부와 동부지역 방어를 수행하였고 이는 이후 지연전으로 작동하는 주요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이후 육군본부 당직근무 당직 장교는 육본 국장들에게 연락을 취했으며 당직사령에게 전군에 비상을 걸 것을 건의했으나 육본 당직사령은 본인에게는 권한이 없다며 거절하였고 당시 육군 참모총장에게 연락이 갔지만 육군 참모총장은 휴가를 즐기다가 새벽 2시에 수면을 취하게 되었었고 참모총장은 통상적인 국지전으로 판단하고 추가 지시를 하지 않고 다시 수면을 취하게 되었다. 결국 전군 비상을 걸게 된 것은 오전 7시(옹진반도 함락 위기, 포천, 연백 지역 함락 시점)였으며 이때 국방부 장관은 주말엔 근무를 안 한다며 전화코드를 빼놓고 자고 있었으며 대통령은 10시 30분(개성 함락 시점)에 전쟁이 터졌음을 보고를 받게 되었다. 미국 역시 대통령을 비롯한 장관과 참모총장 모두 휴가 중이었으며 대응이 늦게 되었다. 

결국 대통령은 6월 27일 새벽 4시(경기도 파주 지역 공방전 중)에 서울에서 대전으로 피신하였고 국회는 새벽 4시 서울 사수 결의안을 제출하기 위해 경무대(현 청와대)에 방문하였는데 이미 대통령이 피신한 것을 알게 되어 강력히 비판했으며 국무회의 각료들도 오전에야 대통령이 피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미국의 경우 주한 미국대사가 전쟁 발발 7시간 26분 뒤인 오전 11시 26분에 미 국무부에 북한군의 공격 첩보를 전달하게 되었다. 정확히는 UP통신의 서울 주재 특파원이 북한군의 전면적인 공격을 워싱턴 본사에 알리게 되었고 워싱턴 본사는 미국 국무부에 사실 확인을 요청하게 되었다. 요청 확인을 받은 미국 국무부(당시 국무부 장관은 메릴랜드 주에 위치한 개인 농장에서 휴식 중이어서 차관보가 대신 복귀함)는 주한 미국대사에 상황보고를 받았고 국무부 차관보와 육군 장관은 미국 시각 6월 24일 오후 10시 30분(한국 시각 6월 25일 12시 30분) 북한의 공격 내용을 분석한 결과 전면적인 공격행위라는 것을 확인하여 국무장관에게 전화상으로 보고하였고 보고받은 국무부 장관은 미주리 주의 개인 저택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미국 대통령에게 북한이 한국을 침략했다고 보고하게 된다. 결국 워싱턴 D. C.로 복귀하는 비행기를 탄 미국 대통령은 2차 대전을 일으킨 추축국의 형태와 유사하다고 판단하고 지금 차단하지 않으면 3차 대전이 발생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지원군 투입을 결정한다. 같은 시각 미국 뉴욕에 위치한 유엔 본부에서는 미국 유엔 대사의 요청으로 안전보장 이사회가 개최되고 있었고 때마침 한국 대사의 도움 요청이 들어오자 이사회는 찬성 9, 기권 1, 반대 0으로 미국의 결의안을 가결시킨다.

미 대통령이 워싱턴 D. C.로 복귀한 이후 6월 25일 19시 40분(한국시각 6월 26일 오전 9시 40분) 13명의 외교 국방 수뇌부와 회동하여 비공개회의를 열고 맥아더 장군을 한국에 조사단을 파견하며 한국이 요청한 군수물자를 보내도록 하고 제7함대를 일본에 파견하며 극동지역 소련 공군 기지를 제거할 계획을 미 공군에 수립하도록 하며 국무부와 국방부가 소련의 다음 행동 지역을 조사해 판단하게 하였다.

그리고 1950년 6월 28일 17시(한국시각 6월 29일 오전 7시 - 한강 방어선 전투 도중) 미국에서 국가 안보회의가 진행되어 지상군은 배제하고 해공군 위주의 지원을 할 것을 결정하였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은 6월 30일 한국군은 붕괴되어 한강방어선을 유지하고 영토 회복을 위해서는 지상군 투입이 불가피하며 2개 사단 정도는 필요하다고 보고하였다. 결국 미 육군 참모총장은 함동 참모 의장과 상의 후 대통령에 건의하여 1개 연대 전투단을 우선 투입하기로 하였고 유엔에서는 59개 회원국 중 33개 회원국이 안전보장 이사회의 결의안을 지지 선언을 하였고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 네덜란드 6개국은 군대 파견을 약속하게 되었다.(이 사건으로 인해 유엔의 최초이자 마지막인 유엔군이 편성되게 되었으며 현재도 중립국을 중심으로 유엔군이 편성되어 있습니다.)

한강 방어선 전투

시흥지구 전투사령부에서 서울이 함락된 직후인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3일까지 수행한 전투로 와해되어버린 서부 방어 병력을 수습하여 한강 남쪽에 방어선을 구축해 북한군 제1군단 예하의 보병 3개 사단 및 전차 1개 여단의 한강 도하를 6일간 저지한 전투입니다.

한강은 평균 강폭이 700~1000미터에 이르며 수심이 3.5미터 깊이까지 이르기 때문에 다리가 없이는 도하가 힘들었고 북한군과 대치하기엔 좋은 장애물이었다.

1950년 6월 28일 서울 중심부에 진입한 북한군 제1군단은 제3사단, 제4사단, 제105 전차 여단으로 한강 도하를 시도했으며 제6사단을 경인가도를 차단해 영등포 지역에서 한강 방어선을 구축한 국군의 좌측면을 위협하면서 인천항을 차지하려고 시도했다. 이에 국군 육군본부는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시키고자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당시 한강 남북을 연결하는 유이한 다리인 한강 인도교와 한강철교를 폭파시키게 되었고(당시에 정부의 주민 대피가 진행되지 않아 서울 시민들은 6월 27일이 되어서야 국군이 서울 이남까지 후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북한군이 서울 외각에 들어올 때 서둘러 대피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때 한강 다리를 폭파시킬 때는 많은 서울 시민들이 있었고 폭파와 함께 많은 시민들이 사망하였고 대피하지 못한 서울시민들은 그대로 북한에 강제로 잡히게 되었습니다. 이후 폭파를 시킨 공병대 지휘관을 사형시켰지만 정황상 상부(누가 지시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음)에서 지시하였지만 꼬리 자르기로 대신 죽은 것으로 보입니다.) 한강 이남으로 철수한 병력을 다시 규합해 현재의 양화대교(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부터 광진교(서울특별시 강동구 천호동)까지의 24km의 방어선을 구축하게 되었다.

북한군 전차가 1950년 6월 28일 새벽 1시 미아리 고개(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를 넘어 서울 도심지로 진입하면서 서울의 방어선이 붕괴되게 됐고 북한군은 같은 날 오전 11시 30분 서울을 점령했음을 공식 발표하게 됐다. 하지만 한강을 바로 도하하지는 않았으며 이 사이 국군은 산재된 병력을 규합하여 시흥지구 전투사령부를 편성해 한강선에서 미 지상군이 지원 올 때까지 현재의 전선을 최대한 지연시킨다는 데에 목표를 두게 되었다. 채병덕 국군 육군 참모총장은 육군본부를 수원 농업시험장으로 이동시킨 후 김홍일 육군 참모 학교장을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한강 방어 임무를 부여하였고 이윽고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은 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을 혼성 제7사단장에 수도사단장 이종찬 대령을 혼성 수도사단장에 제2사단장 임선하 대령을 혼성 제2사단장에 임명하여 한강 이남에 방어선을 구축하도록 하였다.

혼성 수도사단은 제8연대, 제18연대, 기갑연대 제1장갑 대대로, 혼성 제2사단은 제3연대, 제5연대, 제16연대, 보병학교 혼성 연대(혼성 대대), 기갑연대(제2기병대대)로, 혼성 제3사단은 제22연대, 제25연대, 사관학교 생도대로 혼성 제7사단은 제1연대 혼성 대대, 제9연대 혼성 대대, 제20 연대 혼성 대대, 제25연대 혼성 제2대대, 제15연대로 각각 재편되었다.

하지만 병력은 연대규모에도 미치지 못했고 공용화기 또한 매우 부족해 소총부대 수준이어서 역습이나 기습은 사실상 불가능하여 자연 방어물을 최대한 이용해 북한군의 도하 저지를 계획하게 되었다.

시흥지구 전투사령부는 여의도 비행장을 포함하는 영등포, 노량진, 신사리에 이르는 지역이었고 혼성 제7사단은 7개 대대 병력으로 노량진(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영등포(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간 강변지역과 동작동(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노량진 간 고지대를, 혼성 수도사단은 3개 대대 병력과 1개 장갑 대대, 57mm 대전차포 2개 소대로 김포(경기도 김포시) 방면과 여의도 비행장(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을 포함한 영등포 지역, 혼성 제2사단은 신사리-말죽거리(서울특별시 강남구 도곡동) 방면에 배치되었고 이산포(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법곳동)-행주(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동)에서 도하 철수한 제1사단은 시흥에 집결해 예비대로 편성되었다. 그리고 혼성 제3,5사단 일부 병력을 전방부대에 보강하여 한강 남안을 잇는 선에 배치하고 북한군을 저지하고자 하였으며 김포지역에서는 김포지구 전투사령부가 북한군 제6사단의 영등포 진출을 저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흥지구 전투사령부는 통신망의 미비로 혼성 제7사단과 혼성 수도사단이 방어하는 노량진-영등포 방어에 치중했으며 혼성 제2사단은 관악산(경기도 과천시 중앙동)으로 인해 수원의 육군본부가 직접 지휘했고 김포지구사령부는 독자 운영되게 되었다. 6월 28일 북한군 제6사단은 국군 지휘부가 예측하지 못한 김포반도로 도하해서 김포비행장(서울특별시 강서구 방화동)을 점령했고 영등포 방면의 방어선 후방을 위협하게 되었다.

그리고 6월 29일 북한군은 도하를 시도하기 위해 선발적인 포격을 시도하는 한편 제4사단을 여의도 방면으로 제3사단은 흑석동(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 신사리(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사동) 방면으로 도하를 시도하게 되었다. 북한군은 서울 시가지를 점령하면 전쟁이 사실상 끝난다는 정치적 판단과 한강 도하에 필요한 도하 장비를 충분히 비축하지 못했다는 현실적 문제로 인해 하루 반 정도를 강북지역에 머물게 되면서 공격이 지연되었다.

29일 여의도 밤섬을 장악한 북한군은 본격적인 한강 도하를 위해 흑석동, 여의도, 신사리 일대에 탐색전을 전개하였고 미국의 더글라스 맥아더 극동군사령관은 한강방어선을 방문하여 전황을 살피고 방어군의 사기를 북돋아 준 이후에 본국에 보고하게 된다. 김홍일 사령관은 전선 방어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도록 지시한다.

29일 야간 북한군 제3사단과 제4사단은 전차포와 화포의 집중적인 지원 아래 여의도, 흑석동, 신사리 일대에 탐색전 다시 전개하였고 북한군은 노량진 부근의 고지와 능선을 장악하면 상행선 철교를 이용해 전차를 도하시켜 한강선을 돌파할 계획을 세웠으나 국군의 저지로 좌절되었다.

북한군 제4사단은 30일 새벽부터 여의도 비행장을 공격하였으나 국군 혼성 수도사단이 성공적으로 방어하였고 북한군 제3사단은 흑석동과 신사리 방면으로 도하를 시도하였으나 혼성 제7사단과 제9연대의 방어와 미 공군의 지원으로 저지되었다. 하지만 기갑연대 제2기병 대대가 방어하던 신사리는 포병의 지원을 받는 북한군 제3사단의 일부 병력에 의해 돌파되어 혼성 제2사단장은 재편 중인 제5연대와 제16연대를 제3연대와 함께 남태령(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동)-우면산(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95 고지를 잇는 방어선에 배치하여 방어를 하였다.

30일 북한군 제3사단은 신사리-말죽거리 방면으로 본격적인 도하를 개시하였고 김포반도에서는 김포비행장을 놓고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은 김포반도를 방어하기 위해 편성된 우병옥 김포지구 전투사령부 사령관에게 김포비행장 탈환을 지시했다.

7월 1일 새벽 영등포 대안의 북한군 제4사단이 여의도~영등포 지역으로 도하를 감행하였고 노량진과 여의도에서 전투가 진행되었고 방어에 성공하게 된다. 지속적인 도하 실패로 북한군은 전차 지원 없이는 도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경부선 철교 복구 작업을 진행한다. 말죽거리 일대에서는 혼성 제2사단이 95 고지 및 남태령 일대의 진지를 방어하는데 주력하였고 제25연대는 판교 방향으로 침투한 북한군을 저지하였으며 혼성 수도사단 및 혼성 제7사단의 후퇴에 필요한 말죽거리-수원선 확보를 위해 혼성 제3사단 제22연대가 판교(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판교동) 남쪽 금곡리(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금곡동) 일대에 저지 진지를 구축하게 된다.

2일 국군은 영등포 진지와 노량진역 부근의 강변 진지에서 공방전을 지속하였고 노량진 대안의 북한군 제3사단은 소강상태에 있었고 여의도 대안의 제4사단은 여의도 비행장 점령과 혼성 수도사단 제8연대 진지 돌파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해 소강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또한 미 공군의 지속적인 포격으로 북한군의 전차 도하 시도를 저지하게 된다. 그리고 말죽거리 방면으로 신사리에 도하에 성공한 북한군 제3사단 제8연대는 국군 제5연대의 저지선을 돌파해 95 고지까지 진출함으로써 위기가 생겼으나 미 공군의 포격으로 저지되었다. 혼성 제2사단이 주력 병력이 철수할 1번 국도의 엄호 임무를 부여받아 말죽거리 지역에서 철수하자 판교 금곡리에 배치된 혼성 제3사단이 말죽거리-판교 방향의 방어를 담당하게 되었다.

김포지구사령부는 6월 30일부터 7월 3일까지 오류동(인천광역시 계양구 오류동) 일대에서의 공방전으로 한강방어선 서측방으로 진출하고자 한 북한군의 시도를 좌절시켜 아군 주력의 퇴로가 차단되는 위기를 극복하게 된다.

하지만 북한군은 남아있던 1개의 한강철교를 복구하는 데 성공하여 7월 3일 제105 전차 여단을 도하하는 데 성공하면서 한강 이남으로 진출이 가능해졌고 북한군 제4사단은 복구된 경부철교를 통해 4대의 전차를 도하시키고 후속 병력을 영등포 방면으로 우회하여 공격하는 방식으로 노량진과 영등포 일대를 공격하였고 북한군 제4사단은 노량진 방면으로 도하하여 영등포를 위협하였고 제6사단 14 연대 일부 병력은 오류동을 돌파하는 데 성공해 영등포에 진출하였고 본대도 도하에 성공하자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은 국군 주력을 부대별로 안양(경기도 안양)과 과천(경기도 과천)으로 후퇴시켰다.

7월 3일 경부선 철교가 복구되면서 북한군 전차가 노량진으로 진입하게 되었고 말죽거리를 장악한 북한군은 판교에 진입하면서 시흥지구 전투사령부는 한강방어선에서 철수하게 되었지만 6일간의 성공적인 방어로 인해 국군은 분산된 병력을 수습할 시간을 벌었고 미국 지상군이 오는 시간 또한 벌게 되어 성공적인 방어전으로 분류됩니다.

지연작전

결국 한강 방어선이 붕괴된 이후 유엔군이 참전하였지만 아직 유엔군이 조직화되지 못하였고 이에 한반도에서 방어하기 쉬운 낙동강 방어선까지 최대한 천천히 북한군이 진격하도록 국군과 유엔군이 1950년 7월 1일부터 7월 31일까지 수행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미국 지상군의 증원 병력이 전개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고 상륙작전이 가능하도록 만든 작전으로 중요한 작전중 하나입니다.

북한군 제1군단은 경부국도를 중심으로 하여 1950년 7월 3일 한강 방어선을 돌파한다. 북한군 제2군단은 여전히 강원도에서 제대로 진격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제2사단, 제15사단은 7월 초 한강을 넘어온 뒤 아직 국군이 배치되지 않았던 장호원(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이천, 여주까지 은밀히 기동하고 있었으며 제1사단, 제12사단은 충청북도 충주와 제천까지 진출하였으며 제5사단은 삼척까지 진출한 상태였다. 이로 인해 북한군은 최초 계획인 국군이 서울을 방어하는 동안 강원도로 우회하여 경기도 수원을 장악해 포위 섬멸을 하는 계획을 버리고 전면 진격전으로 미군이 부산에 배치되기 이전에 본토 점령을 목표로 바꾸었음을 알 수 있다. 북한군이 한강 이북에서 시간을 낭비하던 사이 국군은 병력을 재편하는 데 성공하였고 지연작전을 수립하여 미군이 배치될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으로 바꾸게 되었다. 육군은 38도선 초기 방어에 큰 피해를 입으며 한강 방어선 전투를 통해 여러 사단이 전투가 힘든 상태까지 오게 되어 전투가 힘든 사단과 연대를 다른 사단과 연대에 통폐합시키고 제1군단과 제2군단을 창설해 육본과 사단 사이의 사령부 역할을 담당하도록 하여 육본의 지휘 부담을 감소시키고 작전지휘의 효율성을 증대시켰다. 그리고 7월 5일부터는 미군 선두가 경부선의 서측을 담당하고 동쪽을 국군이 전담하였으며 7월 14일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유엔군 사령관에게 작전통제권을 이양하였다.(참고로 현재까지도 국군 작전통제권은 유엔군 사령부가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작전통제권을 평시와 전시로 나누어 평시 작전권은 노태우 정부 때 추진하여 김영삼 정부 때 환수를 받았고 전시 작전권 또한 같은 시기에 환수를 하기로 하였으나 이 시기가 계속 뒤로 미뤄져 현재까지 환수되지 않고 있습니다.) 작전통제권을 받은 유엔군은 국군을 지휘하였고 육군의 경우엔 미 제8군의 지휘를 받게 된다.

육군은 제1군단에 수도사단, 제1사단, 제2사단을 편성하였고 제2군단엔 제6사단, 제8사단을 제23연대와 기갑연대를 육본 직할로 재편성하였고 해군과 공군의 전력을 추가로 보강하여 육군과 유엔군과의 합동작전을 도울 수 있도록 준비하게 된다.

해군은 6월 27일부터 미군과 연합작전을 진행해 6월 30일부터 해상봉쇄를 하고 있었고 공군은 7월 2일부터 F-51 전투기를 10대를 보유하게 되어 6일부터 전투비행단과 정찰비행단을 창설하여 근접 항공 지원을 하였으며 미 공군은 7월 5일 대전에 공지합동작전본부를 설치하여 6개 전술항공 통제반을 운용해 공지 작전의 효율성을 높이고 오폭 사고를 감소시켰다.

초기 지연 작전

초기(7월 1일~ 7월 13일)에 진행된 지연작전은 한강 방어선 붕괴 이후 진행된 작전으로서 혼성 수도사단과 제7사단, 제2사단은 7월 3일 한강방어선이 붕괴되자 축차적인 지연 진지를 편성해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하고자 하였고 국군 제6사단은 안성, 음성, 충주에 배치되었고 제8사단은 충북 제천에 배치되어 지휘체계를 유지하면서 북한군 제2군단의 진출을 지연시키고 있었으며 경기도 이천으로 기동 하던 북한군 제2사단과 제15사단을 파악하고 제6사단 예하 연대를 출동시켜 지연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또한 국군 제3사단 제23연대는 동해안 강원도 울진(현재는 경상북도 소속)으로 출동하여 북한군 제5사단의 진출에 대비하게 된다. 

한미 연합작전의 합의에 따라 평택-안성선에 전개된 미 지상군이 경부국도(아직 고속도로가 건설되기 전)를 중심으로 서부를 담당하고 국군은 우측에서 동해안까지 전선을 분담하여 작전을 전개하게 된다. 1950년 7월 1일 미국의 선두 부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부산에 도착하였고 이에 육군 총참모장 정일권 소장이 대전에 있는 미 극동군사령부 전방지휘소에서 처치(Church) 준장과 작전 협의를 하였었고 결과 북한군 남진을 조금이라도 더 늦추기 위해 재배치를 결정하게 된 것이었다. 이에 따라 7월 4일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경기도 오산 부근까지 도착하였고 이에 국군은 미군에 지역을 이양하고 평택 일대에서 재편성하여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해당 계획은 북한군을 저지하면서 미 제24사단의 진출을 엄호하여 한미 양국이 한반도 남쪽에서 동서 축이 가장 짧은 경기도 평택 - 경기도 안성 - 충청북도 충주 - 강원도 울진을 잇는 선에서 북한군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서부지역에서는 미 지상군인 제24사단이 배치될 예정이었고 해당 사단의 선두그룹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7월 1일 경상남도 부산에 도착한 뒤 7월 4일 경부국도의 죽미령(경기도 오산시)에 배치되어 북한군 제105 전차 사단, 제3보병사단, 제4보병사단의 공격을 방어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중서부 지역(경기도 이천, 충청북도 진천, 충청북도 청주, 충청북도 음성)에서는 국군 제1군단 예하의 수도사단, 제1사단, 제2사단이 북한군 제1군단 예하의 제2사단과 제2군단 예하 제15사단의 공격을 방어하게 된다.

북한군 제2사단은 강원도 춘천-경기도 가평-경기도 광주 방향을 따라 충북 진천으로 서남진 하였고 제15사단은 강원도 홍천 - 경기도 이천 - 장호원(경기도 이천) 방향으로 충북 음성 방향으로 제2군단으로 배속된 제1사단이 경기도 수원 - 김량장리(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김량장동) - 장호원 방향을 따라 충북 충주 방향으로 동남진 하였다.

이에 국군은 신림(강원도 원주시 신림면)-목계(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장호원(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죽산(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안성을 연결하는 차령산맥 북쪽에 제2차 방어선을 편성하였으나 북한군 선두 부대가 지역 내로 쇄도하였고 서부를 담당하던 미군이 오산에서 철수하여 차령산맥과 소백산맥 중앙 지대에 새로 진지를 편성하게 되자 국군은 충청북도 진천을 기준으로 동쪽 방어를 진행하게 된다. 이에 국군 제1사단, 제6사단, 제7사단은 충청북도 음성 일대에서 북한군 제15사단을 저지하였고 제6사단, 제19연대와 수도사단은 경기도 이천 - 곤지암(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 충청북도 진천 일대에서 북한군 제2사단의 공격을 저지하였다.

중동부 지역에서는 충주, 제천, 단양에 이르는 중부 내륙의 차령산맥과 소백산맥까지의 지역을 국군 제6사단, 제8사단이 북한군 제2군단의 제12사단과 제1사단과 교전을 하였으며 육본 직할 제6사단의 제2연대가 충주 일대에서 북한군 제12사단 제31연대와 제1사단과 교전을 하였으며 국군 제8사단은 제천과 단양에서 북한군 제12사단과 공방전을 전개하게 된다. 이에 북한군은 중부 및 동부전선의 제2군단 병력을 중동부 지역으로 집중하여 강력한 공격을 전개하였고 결국 국군은 축차적인 철수를 통해 부대를 재편하여야 하였으며 미군과 작전지역을 분담해 차령산맥과 소백산맥의 중앙 지대에 진지를 편성하게 되었다.

동해안 지역은 국군 제3사단 제23연대가 내륙으로 들어온 북한군 제5사단과 동해안에 상륙한 제766부대, 제945육전대의 남진을 방어하였으며 6월 27일 강원도 강릉을 점령한 북한군은 동해안 도로를 따라 남하하며 제766부대와 제945육전대를 강원도 울진(경상북도 울진)으로 진격하게 하였다. 이에 육본은 6월 28일 국군 제8사단을 강릉 수복 대신 제천으로 철수시키고 경상남도 부산(부산광역시)에 있던 제3사단을 투입해 지연작전을 펼치게 하였다. 제3사단은 2개의 연대로 구성되어 있었고 개전 초기에 제22연대를 육본 긴급명령으로 서울 수도권 방어선에 급파하였었고 제23연대를 동해안 지역으로 보내었다. 제3사단 제23연대는 경상북도 대구(대구광역시)를 경유해 경상북도 포항에 기차로 도착한 다음 29일 차량을 이용해 경상북도 영덕-영해(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평해(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를 거쳐 울진 남쪽 왕피천(경상북도 울진군 금강송면)에서 방어선을 형성하게 된다. 하지만 7월 1일 제23연대는 큰 피해를 입으며 울진을 수복하였지만 3시간 만에 북한군의 강한 공격에 철수하게 되며 울진에서 영해까지 60km 구간을 지연전을 수행한다. 이때 유엔 해군은 북한군에 대해 해안 포격을 가해 북한군의 보급로와 집결지를 차단하였고 함재기를 출격해 북한군 부대와 북한이 점령한 주요 시설 및 교량을 파괴하게 된다. 그렇지만 북한군이 포항 근처까지 위협하게 되자 유엔 해군의 지원이 강화되어 북한군의 남진 속도를 크게 둔화시키게 된다.

금강-소백산맥선 지연작전

1950년 7월 14일부터 31일까지 금강, 소백산맥, 동해안, 서남부지역에서 지연작전이 진행되었고 미국이 공주-대전선을 방어하며 국군이 그 오른쪽부터 동해안까지 방어를 분담하게 된다.

금강 지역에서는 미국 제24사단이 7월 14일 제19연대와 사단 포병을 대평리(세종특별자치시 대평동)에 제34연대를 충청남도 공주에 배치하고 북한군 제3,4사단의 공격을 방어하게 된다. 7월 14일 제34연대가 북한군 제4사단의 공격을 받게 되고 7월 16일 제19연대가 북한군 제3사단의 도하 공격을 받게 된다. 미 제19연대는 이때 부대가 와해되어 버렸고 충청남도 대전으로 철수하게 된다. 7월 19일 대전으로 북한군은 3개 방향으로 공격을 하였고 7월 20일 미국 제24사단은 사단장(William F. Dean(윌리엄 프래시 딘) 소장)이 실종되며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고 충청북도 영동 북쪽으로 철수하게 된다.

한편 경상북도 포항에 상륙한 미국 제1기병사단은 7월 19일부터 충청북도 영동 부근으로 진출해 전선을 인수받게 되었고 충청북도 영동과 경상북도 김천 일대에서 북한군과 교전하게 된다. 미 제1기병사단은 7월 22일부터 북한군 제3사단과 공방전을 전개하였고 7월 27일 황간(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측면의 북한군 제2사단과 교전을 하게 된다. 이에 미 제8군 사령관(Walton H. Walker(월튼 해리스 월커) 중장)은 제25사단을 경상북도 상주 부근으로 급히 투입해 국군 제1사단과 연결해 방어전을 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북한군의 공세에 미 제25사단은 상주 부근에서 철수하게 되고 제1기병 사단과 함께 경상북도 김천-왜관(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으로 남부 통로 주변의 미 제24사단은 경상남도 합천-경상남도 진주로 철수하게 된다. 결국 미 제8군 사령관은 전 부대를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해 방어선 재조정을 하도록 하였고 제25사단은 경상남도 마산(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마산합포구) 서측 지역을 방어를 하게 되고 미 제24사단은 제17연대의 배속과 함께 북쪽으로 이동해 새로운 진지를 점령하게 된다.

그리고 소백산맥 지역에서는 국군 5개 사단인 수도사단, 제1사단, 제2사단, 제6사단, 제8사단이 중동부 산악지대인 미원(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이화령(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주진리)-조령(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풍기(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지역으로 철수하여 북한군 제2군단 제1사단, 제8사단, 제12사단, 제15사단과 교전을 하게 된다.

국군 수도사단과 제2사단은 충청북도 청주 일대에서 충청북도 보은지역으로 철수하고 있었으며 국군 제1사단은 미원(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경상북도 상주에서 북한군 제15사단을 격퇴한 후 함창에서 북한군 제13사단과 교전하게 된다. 또한 국군 제17연대는 경상북도 안동으로 이동 중 17일부터 23일 동안 상주 부근 화령장(경상북도 상주시 화서면)에서 북한군 제15사단을 기습하여 큰 피해를 주게 된다. 국군 제6사단은 이화령-조령-경상북도 문경에서 북한군 제1사단, 제13사단을 견제하며 영강(경상북도 문경시 마성면 하내리)-유곡리(경상북도 상주시 낙동면 유곡리)-점촌(경상북도 문경시 점촌동)까지 후퇴하였고 국군 제8사단은 풍기(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경상북도 영주-경상북도 안동 일대에서 북한군 제8사단, 제12사단의 공격을 지연시키게 된다.

육군 본부는 7월 25일 북한군의 이동경로를 파악해 방어부대 배치를 재조정하였고 이로 인해 국군 제1사단은 미 제25사단에게 지역을 인계하고 7월 26일부터 점촌 지역의 국군 제6사단 좌측으로 이동하였으며 국군 수도사단은 국군 제6사단을 1개 연대로 증원하고 나머지 2개의 연대를 통합 편성하여 경상북도 예천 부근의 미 제25사단 제24연대와 교대해 북한군을 지연시킨다.

동해안 지역의 경우에서는 국군 제3사단이 유엔 해군의 지원하에 북한군 제5사단과 제766부대의 공격을 지연시켰으며 7월 21일 경상북도 영덕에서 공방전을 진행하며 북한군을 저지하게 된다. 3사단 독립 기갑연대는 진보(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지역에서 북한군 제766부대의 내륙 침투를 저지하여 방어선의 양분되는 위기를 방지하게 된다.

서남부지역에서는 호남지역과 경상남도 거창-경상남도 하동 일대에서 지연을 전개하게 되는데 호남지역에서 방어하는 병력은 재편 중이던 국군 병력과 경찰을 합해 2500여 명에 불과하였고 결국 북한군 제6사단이 강경(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부근을 뚫고 남진을 하게 되었고 아군 병력은 전라북도 전주-전라북도 김제-전라북도 정읍-전라북도 남원-전라남도 순천 일대로 철수하게 된다.

북한군 제6사단은 경상남도 하동-경상남도 진주로 공격 방향을 바꾸게 되었고 충청남도 대전-전라북도 무주에 진출한 제4사단이 안의(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경상남도 거창 지역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에 미 제8군 사령관은 신임 미 제24사단장 처치 소장(이전 지휘관은 실종되어 구조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여 사망한 것으로 처리하였습니다. 다만 나중에 포로로 잡혔다는 것이 확인돼 포로교환 시기에 정상적으로 포로 교환됩니다.)에게 거창-진주 지역을 방어하도록 명령하게 된다. 처치 소장은 즉시 재편 중이던 사단을 7월 24일부터 26일에 거창-진주로 배치하여 25일부터 북한군의 공격을 지연시킨다.

이로서 국군과 미군은 부대를 재편성하고 미군의 후속 지원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지연작전을 전개하여 낙동강 일대에 설정된 방어선까지 철수하게 된다. 왜관(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에서 동해안 영덕까지는 국군 제1사단, 제6사단, 제8사단, 수도사단, 제3사단이 방어를 담당하고 왜관 서남쪽의 방어를 미 제1기병사단, 제24사단, 제25사단이 담당하였고 8월 들어 미 제2사단, 해병 제1여단, 제5연대전투단, 3개 전차대대가 증원되어 방어를 진행한다.

사전 대비나 준비가 적었지만 지연작전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고 낙동강 방어선이 강화되었으며 이후 공세로 전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또한 이미 미국과 유엔군의 해군과 공군이 제공권과 제해권을 장악하여 북한의 남진을 저지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낙동강 방어작전

낙동강 방어작전은 국군과 유엔군이 1950년 8월 1일부터 9월 23일까지 북한군에 대항에 방어전을 치르게 된다.

낙동강 방어선은 부산 교두보 또는 워커 라인으로 불렸으며 부산 교두보는 부산을 기지로 총반격을 위한 교두보라는 의미이며 워커 라인은 미 제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 설정한 최후의 방어선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참고로 해당 방어선이 붕괴하면 한국 정부와 약 100만 명의 한국 국민을 남태평양에 위치한 미국령 서사모아 제도로 옮기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며 뉴질랜드 등이 협조하기로 되어있었습니다.)

낙동강 방어작전 동안 국군은 왜관 북쪽으로부터 동해안까지의 산악지형을 방어하고 미군은 왜관 이남에서 마산 서부까지의 평야지대에 방어를 진행하게 된다. 지연전 및 제공권 제해권 장악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은 소련제 T-34 전차와 자주포로 무장하여 남진을 계속 진행하였고(당시 한국군은 전차가 없었음) 북한군 13개 사단 중 11개 사단을 투입하고 주력을 대구-부산 방향으로 공격을 하며 전 전선에서 압박을 가하게 된다. 결국 국군과 유엔군은 부산을 중심으로 한 교두보 확보가 필요했으며 유엔군의 보급이 부산항을 통해 진행되고 있어 방어가 필수적이었다.

7월 31일 방어선 구축을 시작한 국군과 유엔군은 여러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는데 첫 번째는 북한군 제6사단의 빠른 우회로 충청도, 전라남도를 거쳐 경상남도 서부로 진입하였다는 것이었고 이를 미 제25사단을 배치하는 것으로 대처를 하게 되었고 두 번째는 중동부 지역에 국군이 철수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였는데 제1군단 예하의 수도사단과 제8사단이 안동에서 철수하는 도중 수도사단이 엄호를 적절히 수행해 주지 못하여 북한군이 제8사단 뒤를 바짝 추격하였고 이 과정에 제8사단이 강을 건너 철수하기 전에 안동 인도교와 철교를 조기에 폭파하면서 제8사단이 재편성해야 되는 큰 피해를 입게 된다.

미 제8군 사령관은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부산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천연 장애물인 낙동강을 최후 방어선으로 결정하였고 이에 1950년 8월 1일부터 4일까지 방어선을 형성하게 된다.

낙동강 방어선은 국군이 128km 미국이 112km를 담당하였으며 낙동강 방어선 중동부 및 동부 산악지역을 국군 2개 군단 예하 5개 사단인 제1사단, 제3사단, 제6사단, 제8사단, 수도사단이 방어를 하였고 중부 및 서부의 평야지대와 교통 발달 지역은 미 제8군 직속 4개 사단인 제1기병사단, 제2사단, 제24사단, 제25사단과 미 해병 제1여단이 담당하게 된다.

구분 구간 기간
낙동강 방어선 형성 X선 마산-합천-김천-상주-예천-안동-영덕 8월 1일 ~ 8월 3일
Y선 마산-남지-왜관-낙정리-영덕 8월 4일 ~ 8월 12일
낙동강 방어작전 X선 왜관-수암산-유학산-신주막-군위-보현산 8월 13일 ~ 9월 14일
Y선 Y선 후방의 집결지

국군과 유엔군은 최초에는 낙동강 연안에서 북한군 공격을 막아내지만 12일에는 최후의 방어선으로 철수해 결전을 치르게 된다. 이 과정에서 미 제8군단은 대구 북쪽의 전략적 요충지인 다부동 일대에서 국군 제1사단 및 미군 2개 연대를 긴급 투입하여 북한군의 강한 공격을 저지하고 대구를 사수하게 된다. 또한 미 공군의 대규모 융단폭격으로 북한군에 심리적 타격을 주며 전투력 분산을 유도하였다.

낙동강 방어선 작전 중에서는 미 제8군단은 군단의 편성이 되지 않은 채로 직접 예하 사단을 통제하며 전투를 수행하였지만 북한군은 7월 말에 낙동강 방어선 외곽지역인 경상북도 영덕-경상북도 안동-함창(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경상북도 상주-경상북도 김천-경상남도 진주를 연결하는 역 ㄱ자의 선까지 진출하게 된다. 또한 8월 대구와 부산을 점령해 작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총공세를 펼치게 된다.

북한군은 한반도 공산화라는 목표로 8월과 9월에 총공세를 실시하였으며 8월에는 13개 보병사단 중 11개의 사단을 투입해 전 전선에 공격하였으며 대구와 마산을 주력으로 공격하게 된다. 하지만 북한군은 부분적 돌파에는 성공하지만 돌파구 확장에는 실패하게 되고 9월에는 13개 사단 모두를 5개 공격집단으로 편성해 대구, 영천, 경주, 창녕, 마산에 동시다발적 공격을 진행하게 되지만 실패로 돌아가며 유엔군의 인천 상륙작전 성공과 낙동강선 반격으로 38도선 이북으로 철수하게 된다.

 

중서부 지역의 작전

중서부 지역에서는 대구 북방의 다부동(경상북도 칠곡군 금산면 다부리)-왜관(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팔공산(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동산리) 지역에서 한미연합군인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이 전차가 증강된 북한군 5개 보병사단인 제1사단, 제3사단, 제10사단, 제13사단, 제15사단을 방어하였다. 다부동-왜관의 서측에서는 미 제24사단이 현풍(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에서 낙동강 돌출부에 이르는 지역까지 방어작전을 수행하고 있었고 동측에서는 국군 제6사단이 경상북도 의성-신녕(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지역에서 북한군 제1사단을 방어하게 된다. 대구의 관문인 다부동지역이 위기에 빠지자 미 제8군 사령부는 미군 2개 연대인 미 제23연대와 제27연대를 국군 제1사단 방어 지역에 긴급 투입하여 전투력을 증강하고 방어 종심을 깊게 함으로써 전차를 동반한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였고 낙동강 근처의 경상북도 구미 일대에 융단폭격을 실시함으로써 북한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었고 북한군이 한 곳에 전투력 및 군수물자를 집중할 수 없도록 하였다. 이후 제1사단은 다부동 지역을 미 제1기병사단에게 인계하고 경북 신녕으로 이동하여 팔공산-가산(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전투를 수행하게 된다.

하지만 9월에 이르자 다부동과 왜관을 빼앗기게 되어 미 제1기병사단은 대구 북방의 가산산성 일대로 후퇴하며 총반격 작전까지 방어를 하게 된다. 이를 위해 국군과 경찰도 증원되어 전투를 수행하게 된다. 북한군은 부산으로 가는 최단거리이자 전략적 요충지인 대구를 점령할 수 있도록 총력을 집중하게 된다. 결국 국군 제1사단은 북한군 제1사단, 제13사단, 제15사단과 교전을 하였고 미 제1기병사단은 북한군 제3사단, 제105 전차 사단과 교전하게 되며 이후 북한군 제10사단이 증원된다.

국군 제1사단은 8월 3일 낙동강 방어선의 42km 범위를 담당하며 진지 편성과 부대 전개를 하여 방어를 준비하였지만 사단의 병력 수준은 원래 보유해야 되는 70% 수준이었고 중화기도 30~40%로 적은 병력과 지원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 상대적으로 우세한 북한군을 방어하기 위해 각 연대를 북한군 예상 도하 지점에 방어 진지를 편성하고 다부동 일대의 주저항선과 팔공산과 가산 일대에 방어선을 형성하여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게 된다.

서부 및 남부지역 작전

서부 및 남부지역은 부산까지 가는 길목인 경상남도 창녕-영산(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지역과 경상남도 진주-마산(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마산합포구) 지역에서 미 해병 제1여단이 증강된 미 3개 보병사단인 제2사단, 제24사단, 제25사단이 전차로 증강된 북한군 5개 사단인 제2사단, 제4사단, 제6사단, 제7사단, 제9사단을 방어하게 된다. 이 시기에 한국 해병대와 한국 육군 부대가 추가로 배속돼 영산과 마산지역에서 방어를 전개한다.

창녕-영산 지역을 담당한 미 제24사단은 대전 전투 이후로 전투력이 약화된 상태였으나 미 해병 제1여단의 증원으로 북한군 제4사단의 8월 총공세를 저지한다. 이후 미 제24사단은 해당 지역을 미 제2사단에 인계하고 미 제8군의 예비대로 편성되어 경북 경산으로 이동하게 된다. 8월 20일에 인수인계한 제2사단도 북한군 제2사단, 제9사단의 9월 공세를 방어하는 데 성공하여 퇴로를 차단하려는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게 된다.

마산 서쪽의 방어는 미 제25사단이 담당하였고 상주지역에서 마산으로 이동해 낙동강선 방어작전에 투입된다. 초기에는 국군 제1사단의 방어지역인 왜관 북쪽을 담당하기로 되어있었으나 북한군 제6사단의 호남 방면 우회 기동으로 미 제8군 긴급명령으로 투입된다. '킨 특수임무부대'로 편성된 미 제25사단은 8월 초 마산 서부에서 진주를 목표로 반격작전을 전개하여 북한군 제6사단의 기동을 저지하고 진주 동쪽에 방어선을 구축한다. 작전 이후 경상남도 함안-마산 지역에서 유엔군 총반격 개시 때까지 북한군을 저지한다. 8월 총공세 때는 북한군 제6사단과 교전하였고 9월 공세에는 북한군 제6사단과 제7사단과 교전하게 된다.

중동부 지역 작전

중동부 지역에서는 경상북도 군위, 경상북도 의성, 신녕(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영천 일대에서 국군 제1군단 예하의 수도사단, 제8사단과 제2군단 예하의 제6사단이 북한군 제2군단 예하의 제1사단, 제8사단, 제13사단, 제15사단, 제17기갑여단, 제73독립연대, 제103 치안 연대의 총공세를 방어하게 된다.

북한군 제2군단은 1950년 8월 5일부터 개시되는 8월 총공세에서 주력을 대구에 집중하였고 경상북도 김천 북방에서 경상북도 영덕까지의 공격을 담당해 경상북도 대구, 경상북도 영천, 경상북도 포항을 점령하고자 하였다. 이에 제15사단을 선산(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다부동(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경상북도 대구 방면으로 제13사단을 경상북도 상주-다부동-대구 방면으로 제1사단을 경상북도 문경-경상북도 군위-대구 방면에 제8사단을 경상북도 안동-경상북도 의성-대구 방면에 투입하여 낙동강 도하를 시도한다. 낙동강 도하에 성공한 북한군 제2군단은 예하의 제1사단을 가산(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도덕산(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 오룡리)-팔공산(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동산리) 지역, 제8사단이 신녕 북쪽의 조림산(경상북도 군위군 산성면 화본리) 부근 제12사단과 제15사단이 보현산(경상북도 영천군 화북면 ) 지구까지 진출하게 된다.

국군과 유엔군은 병참선을 확보하고 우세한 포병과 제공권으로 북한군의 사기를 저하시켰으며 국군 제2군단 제1사단과 제6사단을 왜관-의성지역으로 제1군단 제8사단과 수도사단을 의성-청송지역의 낙동강 상류의 산악지대에 배치하게 된다. 북한군의 8월 공세는 국군과 유엔군의 강력한 저항에 좌절되었고 더욱이 국군의 지연작전으로 인하여 전투력이 50~60% 감소한 데다가 300km로 연장된 보급 경로에 제해권과 제공권 상실로 큰 병력손실과 장비 손실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8월 공세가 수포로 돌아가자 북한군은 제2군단을 제3공격집단인 제1사단, 제3사단, 제13사단, 제17기갑여단으로 구성하여 미 제1 기병 사단과 국군 제1사단이 방어하는 대구를 점령하고 제4공격집단인 제8사단과 제15사단으로 국군 제6사단 및 제8사단이 방어하는 하양, 영천 지역을 점령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9월 대대적인 공세를 진행한다.

이에 국군 제2군단은 방어 전선을 축소시키기로 하고 제1사단을 신녕 지구에서 방어하는 제6사단 좌측으로 이동시켜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고 대구 외곽선을 방어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제6사단은 운산동-화산 지역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방어에 성공하면서 대구를 지켜냈고 제8사단은 영천을 소실하긴 하였지만 경주 방면으로 이동하던 북한군 제15사단을 제5연대와 함께 임포동 부근에서 섬멸하여 다시 방어선을 형성하게 된다.

동부지역 작전

동부지역에서는 영덕, 포항, 기계, 안강에서 국군 제1군단 예하의 수도사단과 육군본부 직할의 제3사단이 북한군 제2군단 예하의 제5사단과 제12사단, 독립 부대인 제766부대의 공세를 저지하게 된다. 개전 초기에 주도권을 장악한 북한군은 지속적인 공세로 7월 말 진주-김천-점촌-안동-영덕을 연결하는 역ㄱ자 모양의 선의 근처까지 진격하였고 북한군 제2군단은 1950년 8월 5일부터 주력을 대구로 보내고 김천 북방에서 영덕까지의 공격으로 대구, 영천, 포항의 점령을 시도하게 된다. 제12사단과 제5사단을 청송-현동-죽창-기계와 영덕-포항을 잇는 직선상으로 공격하여 경주-울산-부산 방향으로 진격하는 발판을 확보하는데 주력하게 된다. 또한 보현산 일대에서 북한군 제766부대가 침투를 시도하며 이 침투를 숨기기 위해 의성-구산동-자천 지역에 공격을 개시한다.

국군 제1군단 예하 수도사단과 육군본부 직할 제3사단이 낙동강 남안의 상아동-구수동-진보-영덕을 연결하는 주 저항선의 편성을 계획했지만 안동에서의 철수작전 실패로 인해 방어선 대신 도로가 이어진 안동-의성 직선과 전략적 요충지인 포항 방어에 중점을 둔다. 그러나 길안과 청송 일대에 방어선을 편성했던 수도사단이 북한군 제12사단의 포위공격에 의해 의성으로 철수하게 되면서 의성-영덕 간 방어선 중 주 저항선이 편성된 지역은 의성 북방의 제8사단의 10km 길이와 영덕 및 강구 일대의 제3사단의 10km의 길이만 형성되게 된다. 북한군 제12사단은 청송-죽장-기계-안강-경주로 이어지는 선으로 침투를 시도하여 8월 9일 경주로 나가는 기계를 점령하게 되고 11일에 포항을 점령하게 된다. 결국 강구 부근에 배치된 국군 제3사단이 고립되어버리고 경주도 위협을 받게 된다.

이에 국군 제1군단은 미 브래들리 특수임무부대와 함께 포항지구 전투사령부를 안강으로 급파하여 북한군 진출을 저지하였으며 8월 14일 수도사단 주력을 현동-죽장-기계 선에 투입하여 포항 일대의 북한군을 북쪽에서 협공하여 8월 18일 기계와 포항을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8월 22일 제1군단은 보현산-침곡산-도음산-93 고지를 연결하는 새로운 방어선을 편성한다.

치명타를 입은 북한군 제12사단은 비학산에서 제766부대를 병합하고 8월 24일 야간 기습으로 국군 수도사단의 주 저항선 좌측을 돌파해 8월 27일 기계를 점령한다. 이에 북한군 제5사단과 제12사단은 9월 2일 공격을 재개하였고 9월 5일 안강과 포항을 점령하고 경주 북서쪽 4~5km 지점까지 접근하게 된다. 이를 대항하기 위해 국군과 유엔군은 9월 5일 무릉산-곤계봉-현산 강 지역에 최후의 방어선을 편성하여 11일간 치열한 공방전을 펼치게 된다.

해, 공군의 작전

해군의 경우 한국 해군과 유엔 해군이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항공모함을 주축으로 한국 해역에서 해상활동을 주도하며 지상작전을 지원한다. 낙동강선 방어작전 시 한국 해군과 유엔 해군의 작전지역 책임을 북위 37도(동해안 : 경상북도 울진, 서해안 충청남도 태안)를 경계로 하였으며 37도 이남을 제96.7 기동 전대로 구성된 한국 해군이 담당하였고 이북은 유엔 해군이 작전을 수행하였다. 동해안은 미국 히긴스 제독의 96.5 기동 전대가 담당하며 서해안은 영연방 해군으로 구성된 96.8 기동 전대가 봉쇄작전을 수행한다. 북방 한계선은 동해안은 북위 41도(함경북도 길주) 서해안은 39.3도(평안남도 안주)

한국 해군은 서, 남해안에서 방어작전을 수행하면서 병력을 철수시키고 군수물자를 수송하였을 뿐만 아니라, 해상봉쇄작전을 전개하여 연안에서 북한군의 해상 침공과 병력과 군수물자 수송을 차단하면서 육지에서의 국군 작전을 지원하였고 그중 통영 상륙작전의 승리로 낙동강 방어선 유지에 도움을 주게 된다. 유엔 해군의 경우 작전 기간 동안 대폭적인 전력증강이 이루어지는데 초기엔 미 제7함대 소속의 밸리포지 호와 영국의 프라이엄프 호 2척의 항공모함으로 지원하였으나 7월 말에 미국의 시실리호와 바동 스트레이트호가 도착하여 96.8 기동전대에 배속되어 해병대 비행전대로 낙동강 방어선에서 근접 항공지원 임무를 수행하였고 8월 1일 극동 해역에 도착한 필리핀 씨 호가 미 제77기동부대에 배속돼 한국전선에서 근접 항공지원을 위해 8월 5일 한국 해역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에 유엔 항공모함은 4척이 배치되게 된다.

하지만 지원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악화되자 유엔군 사령관 멕아더 장군은 8월 8일 함재기를 포함한 모든 항공기를 근접 항공지원과 후방차단작전에 투입하였고 항모 기동부대는 근접 항공지원을 강화하게 된다. 한국 공군은 1950년 7월 말 비행단과 항공기지사령부를 대구비행장인 K-2에 배치하였고 정찰 비행대를 경북 의성에 배치하였으며 북한군의 후방차단작전과 국군 제1군단 및 제2군단에 대한 정찰 작전을 지원한다. 기존 한국 공군 본부는 대구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7월 24일 미 제5공군 전방 사령부가 대구로 이동하고 낙동강 방어선까지 철수하게 되자 비행단을 대구 비행단에서 진해비행장(K-10)으로 옮기고 정찰 비행대를 의성에서 신녕으로 이동해 작전을 하게 된다. 그리고 F-51 비행부대의 한국군 조종사는 8월 1일부터 미국 공군 조종사와 1개 조를 이루어 비행훈련을 실시한 후 8월 15일부터 미 공군 조종사와 같이 출격을 한다. 한국의 T-6 비행부대는 8월 17일 한국 해병대의 통영 상륙작전을 지원하고 9월 영천전투 때 정찰 임무를 수행한다.

미국 극동공군은 지상군 후방차단작전과 근접 항공지원에 우선을 두었으며 한강을 경계로 이북지역은 미 폭격 사령부가 이남을 미 제5공군이 담당하였다. 미 폭격 사령부는 8월 16일 왜관 일대의 융단포격을 제외하고는 38도선 이북에서 작전을 하게 되었으며 8월 7일 평양 조차장에, 8월 8일에는 함흥 조차장에 대대적인 폭격을 가하게 된다. 그리고 미 제5공군은 미국 지상군에 대한 근접 항공지원 임무를 주로 수행한다.

낙동강 방어선 기간 동안 미국 본토의 미 제2사단과 미 제1해병여단 하와이의 미 제5연대전투단이 한반도에 배치되었고 이때 6개의 전차대대가 한국 전선에 투입된다. 그리고 홍콩에 주둔하던 영국 제27여단이 한반도에 배치되면서 한미연합군에서 유엔군 체제로 전환되어 전쟁을 수행하게 된다. 이로 인해 유엔군은 병력과 장비에서 북한군을 능가하게 되었고 성공적인 방어로 이후 인천 상륙작전을 계기로 반격에 나서게 된다.

인천 상륙작전 - 반격의 시작

1950년 9월 15일부터 18일까지 미 제10군단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작전을 전개하여 교두보를 마련하고 서울로의 우회 기동을 통해 북한군의 후방을 차단한 작전이다.

인천은 서울에 서해안에서 접근하는 관문으로 서울은 한반도의 주요 도로와 철도의 교착 지점이며 심리적으로 수도라는 점과 서울과 인천의 점령은 북한군의 후방에 대한 병참 수송로 차단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인구 25만의 인천시는 상륙 작전에 중요한 고려사항이었으나 해안에 발판을 구축하고 도심지를 점령해 야간 전투에 대비한 진지 편성을 하기엔 일조시간이 짧았으며 내륙으로 진전되면 김포비행장을 조기에 확보하고 한강이라는 장애물을 건너 서울 도심지에 도착해 수도를 탈환하는 건 어려운 과제로 되어 있었다. 게다가 서해에서 인천으로 접근할 때는 크고 작은 섬들과 암초가 많이 있었으며 해저에 산재해 있는 모래톱과 갯벌로 진입이 어려워 결국 덕적도와 영흥도에 좁고 굴곡이 심한 수로가 있어 해당 수로로 이용해야 했으며 팔미도에서 해당 수로가 합쳐져 인천항으로 이동하는 하나의 수로만 있으며 인천항에 도달하면 월미도가 장애물로 등장하게 되는 구조였다. 방파제로 인천 육지와 연결되어있는 월미도는 남쪽의 소월미도와 함께 후방에 소규모 내항을 형성하고 있었다.

결국 인천은 상륙에 적합한 해안은 없는 편이지만 월미도에서 인천 본토로 연결되는 방파제가 그나마 약 200m 폭의 상륙 가능한 해안(녹색 해안으로 지정)이 있었고 그 이외에 인천 본토에서 월미도와 방파제가 이어지는 곳에서 북쪽 암벽 약 300m 길이 해안(적색 해안으로 지정), 인천 시가지 남쪽 염전지역인 원도의 동쪽 제방으로 이어지는 작은 해안(청색 해안으로 지정)이 상륙지점으로 선정되게 된다.

당시에 북한군은 인천 월미도에 북한군 제226독립 육전 연대 제3대대의 병력 400명과 제918해안포 연대 예하 부대가 방어를 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고 인천 시가지에 신편 제9사단 예하 제87연대가 8월 12일부터 인천 방어 임무를 인계받아 담당하였으며 월미도 제방에서 북동쪽 주안 염전까지 5~6km의 해안방어는 제884군부대 예하 1개 대대가 배치되어있었다. 그리고 미 제10군단의 정보로는 서울에 약 5000명, 인천 약 1000명, 김포비행장 500명의 병력이 방어를 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인천이 상륙 대상 지점인 줄 모르던 북한은 상륙작전 등 반격 이전에 최대한 빨리 부산을 점령할 수 있도록 총공세를 지속하고 있었으며 결국 김천에 전선사령부를 두고 2개 군단 13개 사단을 배치해 마산-왜관-포항의 전선에 지속적인 총공세를 감행하고 있었다. 북한군은 약 10만 명의 병력이 공격을 하였고 국군과 유엔군은 3개 군단 예하의 10개 사단과 1개 연단으로 총 병력 15만 명으로 방어를 하고 있었다. 미 제8군단은 인천 상륙작전과 동시에 낙동강 전선에서의 반격 계획을 수립하였고 현 낙동강 방어선을 공격 개시선으로 하여 인천 상륙작전 개시 다음날인 9월 16일 오전 9시에 일제히 반격을 하기로 계획을 수립한다. 제8군은 서부 및 서남부지역에서 미군 1개 군단과 4개 사단이 동부에서는 국군 2개 군단이 일제히 반격을 하도록 하였으며 8월 초에 도착하는 미국의 증원부대를 마산 지역에 집중해 진주를 탈환하는 반격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초기 인천 상륙작전을 계획한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는 6월 29일 서울 함락 이후 북한군 진격이 가속화되자 한강 방어선을 시찰하였고 이때 북한군이 한강 방어선을 뚫고 남진한다면 인천으로의 상륙작전이 불가피하다고 전망하였다. 이후 7월 첫 주 그의 참모장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에게 계획을 세울 것을 지시하였고 작전참모부장 에드윈 라이트 준장이 이끄는 합동 전략기획단에 의해 연구되었고 파란 심장인 블루 하츠 작전명을 부여하게 된다.

 계획 수립 이후 미 지상군 참전이 결정된 나흘 뒤 일본에 주둔하던 미 제1기병사단으로 7월 하순에 인천 상륙작전을 할 수 있도록 상륙훈련을 지시하였고 7월 4일 미 극동군사령부에서 상륙작전을 위한 공식 회의가 소집되었다. 블루하츠 계획은 북한군을 38선 너머로 격퇴하는 것으로 7월 22일에 시작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그리고 전선 남쪽에서 미 제24사단과 제25사단으로 반격작전을 미 해병 1개 연대 전투단 및 미 제1기병사단을 돌격 상륙부대로 상륙작전을 진행할 계획이었다. 이에 맥아더 사령관은 7월 6일 호바트 게이 소장을 불러 인천 상륙 작전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였으나 경기도와 강원도 전역이 함락되고 충청남도까지 밀려나는 전선 악화로 인해 7월 10일 계획이 취소되게 된다.

하지만 상륙작전은 반격작전에 필요하였기 때문에 계속해서 구상되었고 합동 전략기획단은 인천, 군산, 해주, 진남포, 원산, 주문진 등으로 한반도의 모든 해안지역을 검토하였고 신규 상륙작전을 크로마이트 작전으로 명명하고 7월 23일 계획안이 완성되어 극동군사령부 관계자들에게  보고하게 된다. 맥아더 사령관이 인천 상륙작전을 계획하였고 극동군사령부는 3가지 작전계획을 제출하게 된다. 작전 100-B는 인천에 작전 100-C는 군산, 작전 100-D는 주문진에 상륙하는 것으로 제출되었고 여기서 작전 100-B가 최종적으로 채택이 되었으며 잠재적으로 9월 15일을 D-Day로 선전하게 된다. 그 이유로는 1950년 가을에 인천 해안에서 상륙작전이 가능한 만조일은 9월 15일, 10월 11일, 11월 3일이었고 여기서 전후 2~3일의 범위가 있게 되었으며 10월 이후는 기후 관계상 상륙하기엔 늦은 시기였기 때문에 9월 15일이 선정되게 된다. 1950년 7월 24일 맥아더는 도쿄에 유엔군사령부를 설치하였고 극동부 사령부의 참모진을 그대로 유엔군사령부의 직책에 활용하게 된다. 그리고 상륙작전을 위한 군단 참모 구성에 앞서 극동군 사령부 참모진에서 인원을 차출해 임시 계획 참모진을 편성을 하였고 8월 15일 새로운 참모진을 극동군 사령부 내의 특별계획 참모부라고 명명하며 참모장에 클라크 러프너 소장을 임명한다.

합동 전략기획단은 8월 12일 극동군 사령부 작전계획 100-B(인천 상륙 안)를 하달하였고 맥아더는 상륙작전의 기본계획을 확정 후 상륙부대의 편성에 착수한다. 그리고 8월 26일 미 제1해병사단과 미 제7단에서 인원을 차출해 상륙작전을 담당할 제10군단을 편성하게 된다. 미 제7사단은 한국에 파병된 다른 부대에 많은 장교 및 기간요원들이 차출돼 병력이 부족하였고 한국 청년 8000명을 선발해 일본에서 훈련시킨 후 배치하게 되고 이들 한국인이 카투사의 시초가 된다. 그리고 국군 해병연대와 제17연대 또한 상륙작전에 참여하게 된다.

인천 상륙작전의 맥아더 계획은 9월 9일 미 합동참모본부에서 최종 승인을 받았고 이에 인천 지역에 대한 정보수집을 위해 첩보대가 파견돼 각 섬들과 해안을 정찰하게 된다.

상륙작전에 참여하는 상륙군의 임무와 과업으로는 1. 인천항만, 해안 교두보 확보 2. 해안 교두보 확보 후 김포 비행장 확보하여 경인가도를 탈취 3. 영등포를 통해 한강 남쪽으로 도하 4. 중앙청(구 조선총독부 건물 현재의 경복궁 앞에 위치하고 광화문을 정문으로 사용하고 있었음) 및 서울의 상징 건물 탈환 5. 남쪽에서 반격해 올라오는 미 제8군단과의 연결 작전이 완료될 수 있도록 수원 방면으로 진격 및 북상하는 북한군의 차단 진지 마련을 하달하게 된다.

상륙군은 1950년 9월 5일 요코하마에서 출항하였으며 작전 수행할 제7합동기동부대를 다음과 같이 구성하게 된다.

  • TF-90 공격 부대(미국 해군 소장 도일)
  • TF-92 제10군단(미국 육군 소장 알몬드)
  • TF-91 봉쇄 및 엄호 작전(영국 해군 소장 앤드류스)
  • TF-99 초계 및 정찰부대(미국 해군 소장 핸더슨)
  • TF-77 고속 항모 부대(미국 해군 소장 어윈)
  • TF-79 군수지원부대(미국 해군 대령 오스틴)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 시작한 교란작전을 시작하였으며 9월 5일부터 평양에서 군산까지 상륙 가능한 모든 해안지역에 대규모 포격을 감행하였고 9월 12일 미국과 영국의 혼성 기습 부대가 군산에 상륙작전을 하여 공격을 진행하였으며 동해안 전대는 9월 14일, 15일 삼척에 포격을 가하였으며 9월 14일 포항 장사동에 소규모 상륙작전을 개시하게 된다. 그리고 9월 12일부터 인천의 관문인 월미도에 폭격을 시작한다.

9월 15일 제7합동기동부대는 미 제7함대 세력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 261척의 함정과 미 제10군단 예하 한국군 2개 연대를 포함한 미군 2개 사단으로 총 7만여 명의 지상군 부대로 공격을 개시한다.

9월 15일 0시 0분 선발대가 구축함을 선두로 인천 수로에 진입하였다. 선견 공격 전대(호위구축함 3척, 상륙함 1척)에는 미 해병 제5연대 제3대대가 탑승하고 있었으며 구축함과 순양함 외에 로체스터호와 맥아더 장군이 동승하는 도일 제독의 기함인 마운트 매킨리호가 합류하고 있었다. 곧이어 월미도를 강타할 미 해병 항공기와 내륙의 정찰 및 폭격을 담당할 고속 항모 부대의 함재기가 출격하여 공격하게 된다. 모든 함정들의 전투배치가 완료되었고 L시를 오전 6시 30분으로 확정하고 선견 공격 전대가 목표지역으로 이동완 료하여 월미도 상륙을 위한 돌격 단계로 들어간다.

오전 5시 45분경 구축함이 월미도에 포격을 시작했고 6시 15분 로켓포함이 해안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 미 해병 제5연대 제3대대가 공격 개시선을 통과하게 된다. 북한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오전 6시 33분 월미도 해안에 상륙하게 되었고 제2상륙부대와 제3상륙부대가 월미도에 성공적으로 상륙을 하게 되며 북한군은 수류탄으로 저항하지만 효과는 없었다.

오전 7시 45분 미 해병대대장은 월미도를 완전 확보했음을 보고했고 이어 오전 10시경 소월미도에 대해 공격을 개시한다. 소월미도는 1개 소대의 북한군 병력이 방어하고 있었으며 미 해병 제5연대 제3대대의 1개 소대가 공격해 1시간의 공방전 끝에 소월미도를 확보하게 된다. 이어 정오경 월미도와 소월미도에 대한 소탕작전이 마무리된다. 북한군은 월미도와 소월미도에 제918해안포대 제2대대의 2개 포대 지원을 받는 육전대 소속 제226연대의 예하 부대원 약 400명이 방어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지만 미군은 손쉽게 교두보를 확보했으며 전사 4명 부상 21명의 피해를 입는데 그치게 된다.  

월미도 상륙작전의 성공 이후 공격 부대 사령관 제임스 도일 소장은 오후 2시 45분 상륙부대의 상륙을 명령하였고 여기에 미 해병 제5연대와 한국 해병 제3대대, 미 해병 제1연대가 참여하였다. 이들은 500정이 넘는 상륙주정과 수륙양용 차량으로 상륙을 개시하게 된다.

미 해군과 해병대 항공기들이 해안에 대한 폭격을 시작하였으며 미 해병 제5연대와 미 해병 제1연대가 중심이 된 상륙부대는 공격 개시선에서 상륙작전을 전개하였으며 적색 해안 2km 범위와 청색 해안 5km 범위를 설정해 개시한다.

미 해병 제5연대와 한국 해병 제3대대는 인천과 월미도로 이어지는 방파제 북쪽으로 상륙하여 인천역과 그 일대의 응봉산 지역을 상륙해 점령하는 것이 주 임무였으며 오후 10시 목표 지역을 점령하게 된다.

미 해병 제1연대는 서울로 향하는 경인가도가 위치한 동인천역 및 수봉산 지역 쪽으로 상륙하는 것이 주임무였으나 조류의 영향으로 상륙에 어려움을 겪어 9월 16일 새벽 1시에 목표지점을 점령하게 된다. 

교두보 확보 이후 지원부대가 상륙을 하였고 9월 15일 병력 1만 3천 명과 450대의 차량을 포함한 장비와 보급품이 양륙 되었고 해당 상륙 속도로 5일 동안 상륙을 해야 될 것으로 전망되었다. 청색 해안은 9월 16일 오후 9시 폐쇄되었고 그때까지 양륙 한 병력은 1만 5천 명, 차량 1500대, 화물 1200톤이었다.

상륙작전에 성공한 미 해병사단은 9월 16일 인천 시가지 소탕을 시작하게 된다. 인천 시가지 소탕작전은 미 해병 제5연대의 작전통제 아래 한국 해병대 사령관의 지휘로 실시되었다. 시가지에 놓인 경인철도를 경계로 하여 남쪽의 응봉산 일대와 도심지역 소탕은 한국 해병 제3대대가 담당하였고 그 외곽인 북쪽의 공장지대를 한국 해병 제1대대가 담당하였다. 북한군 대부분은 인천에서 철수하였지만 일부는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주택가에 숨어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제3대대가 담당한 지역에서는 좌측의 철로 연변을 제9중대, 우측의 도심지역 주택가를 제10중대, 제11중대와 제12중대가 중앙에서 응봉산 공원 일대로 소탕작전을 하였고 제1대대는 해안선 철도를 따라 만석동, 화수동 일대를 거쳐 송림동까지 이동해 소탕작전을 하였고 오후 3시 인천 도심지를 장악한다. 소탕작전은 미미한 피해로 성공적으로 완수하게 된다.

인천에서 서울로 이동하는 동안 미군은 전사 415명, 부상 2029명 실종 6명의 피해를 한국군은 전사 7명, 부상 300명, 실종 16명의 피해를 입게 된다. 북한군은 사살 14000명, 포로 7000명, 전차 50대 파괴의 피해를 입게 된다. 인천 상륙작전으로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이 급속히 와해되었고 서울을 유엔군이 탈환하면서 한반도 남부에 있던 북한군의 보급로가 끊어지게 되었고 인천항만과 서울에 이르는 병참시설이 북진작전을 위해 이용 가능하게 되었다. 결국 이 작전 성공으로 인해 방어에서 북진으로 전세가 바뀌는 계기가 되게 된다. 인천 확보 이후 김포-부평으로 전개해 서울로 향하는 교두보를 확보하였고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완화시켜 대반격의 기회를 제공하게 한다. 이어 유엔군은 김포, 부천, 영등포를 차례로 확보하고 한강을 도하해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초기 전투(1950년 6월 25일)부터 인천 상륙작전(1950년 9월 18일)까지의 주요 전투 항목

괄호 안의 날짜는 전투 시작일부터 종료일까지이고 지명 옆 괄호는 현재 지명입니다.

육군

6월

  • 옹진반도(황해남도 옹진군, 강령군) 전투(6.25~26)
  • 청단(황해남도 청단군)-연백(황해남도 연안군, 배천군) 전투(6.25)
  • 개성(개성직할시) 전투(6.25)
  • 고랑포(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전투(6.25)
  • 임진강(경기도 연천군 군남면 왕림리) 방어선 전투(6.25~26)
  • 양원리(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양원리)-초성리(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초성리) 전투(6.25)
  • 동막동(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동막리) 전투(6.25)
  • 추동리(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추동리)-양문리(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양문리) 전투(6.25)
  • 만세교(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만세교리)-포천(경기도 포천시) 전투(6.25~26)
  • 송우리(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송우리) 전투(6.25~26)
  • 내촌(경기도 포천시 내촌면) 전투(6.25~26)
  • 옥산포(강원도 춘천시 사농동) 전투(6.25)
  • 어론리(강원도 인제군 남면 어론리) 전투(6.25~26)
  • 현리 521 고지(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현리) 전투(6.25)
  • 잔교리(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잔교리)-정족산(강원도 양양군 서면 용소리) 전투(6.25)
  • 연곡천(강원도 강릉시 연곡면 동덕리) 전투(6.25~26)
  • 광원리(강원도 홍천군 내면 광원리) 전투(6.25~26)
  • 안목(강원도 강릉시 견소동)-옥계(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전투(6.25)
  • 군선강(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전투(6.25~27)
  • 김포(경기도 김포시) 도하 저지 전투(6.26~27)
  • 장림-운유산(경기도 김포시 양촌읍 석모리) 전투(6.26~27)
  • 동두천(경기도 동두천) 역습(6.26)
  • 백석천(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전투(6.26~27)
  • 축석령(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이동교리)-금오리(경기도 의정부시 금오동) 전투(6.26~27)
  • 소양교(경기도 김포시 양촌읍 양곡리) 전투(6.26)
  • 창동(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 전투(6.27~28)
  • 미아리(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전투(6.27~28)
  • 봉일천(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 전투(6.27~28)
  • 말고개(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주음치리) 전투(6.27~29)
  • 서울(서울특별시) 시가지 전투(6.28)
  • 노량진(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 전투(6.28~7.3)
  • 영등포(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영등포동) 전투(6.28~7.3)
  • 신사리(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사동) 전투(6.28~7.3)
  • 김포(경기도 김포시) 지역 전투(6.28~29)
  • 원미산(경기도 부천시 원미동)-오류동(서울특별시 구로구 오류동) 전투(6.29~7.3)

7월

  • 울진(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전투(7.1~2)
  • 이천(경기도 이천시) 지역 전투(7.2~3)
  • 시흥(경기도 시흥시)-안양(경기도 안양시)-군포(경기도 군포시) 전투(7.4)
  • 풍덕천(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풍덕천동) 전투(7.4)
  • 죽미령(경기도 오산시 외삼미동) 전투(7.5)
  • 오산 갈곶리(경기도 오산시 갈곶동) 전투(7.5)
  • 평택(경기도 평택시) 전투(7.6)
  • 무극리(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 전투(7.5~6)
  • 동락리(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동락리) 전투(7.6~7)
  • 천안(충청남도 천안시) 전투(7.7~8)
  • 진천(충청북도 진천) 전투(7.7~9)
  • 전의(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읍내리) 전투(7.9~10)
  • 조치원(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전투(7.11~12)
  • 미호천(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강내면 사곡리 -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 전투(7.11~13)
  • 가장동(충청북도 음성군) 전투(7.11~13)
  • 공주(충청남도 공주시) 전투(7.12~14)
  • 대평리(세종특별자치시 대평동) 전투(7.12~16)
  • 이화령(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주진리) 및 조령(충청북도 괴산군 영풍면 원풍리) 전투(7.13~16)
  • 화령장(경상북도 상주시 화서면) 전투(7.14~24)
  • 영덕(경상북도 영덕군) 전투(7.14~8.9)
  • 풍기(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안동(경상북도 안동시) 전투(7.14~8.1)
  • 미원(충청북도 상당구 미원면 미원리) 전투(7.15~23)
  • 고은리(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고은리) 전투(7.17~24)
  • 영강(경상북도 문경시 마성면) 전투(7.17~22)
  • 대전(대전광역시) 전투(7.19~20)
  • 유곡리(경상북도 문경시 유곡동) 전투(7.23~30)
  • 함양(경상남도 함양군)-거창(경상남도 거창군) 전투(7.25~29)
  • 하동(경상남도 하동군) 전투(7.25~27)
  • 함창(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전투(7.28~29)
  • 강경(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전투(7.28~31)
  • 진주(경상남도 진주시) 전투(7.28~31)
  • 권빈리(경상남도 합천군 봉산면 권빈리) 전투(7.30~8.1)

8월

  • 용기동(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용기리) 전투(8.1~11)
  • 낙정리(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낙정리) 전투(8.2~12)
  • 의성(경상북도 의성군) 전투(8.3~13)
  • 영산(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전투(8.5~19)
  • 킨 특수부대(경상남도 진주시,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작전(8.7~12)
  • 금무봉(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금산리) 전투(8.9~13)
  • 보현산(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전투(8.9~13)
  • 기계(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계면) 전투(8.9~28)
  • 포항(경상북도 포항시) 전투(8.9~9.14)
  • 수암산(경상북도 칠곡군 석적읍 성곡리)-유학산(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학상리) 전투(8.13~30)
  • 다부동(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전투(8.13~28)
  • 작오산(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전투(8.14~17)
  • 군위(경상북도 군위군 군위읍)-의흥(경상북도 군위군 의흥면) 지역 전투(8.15~28)
  • 비학산(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신광면 기일리) 전투(8.18~26)
  • 안강(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전투(8.27~9.13)
  • 가산(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팔공산(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동산리) 전투(8.30~9.14)
  • 조림산(경상북도 군위군 산성면 화본리) 전투(8.30~9.4)
  • 창녕(경상북도 창녕군) 전투(8.31~9.9)
  • 마산 서북방(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마산합포구, 경상남도 함안군) 전투(8.31~9.6)

9월

  • 수암산(경상북도 칠곡군 석적읍 성곡리) 전투(9.2~5)
  • 가산(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전투(9.2~11)
  • 기룡산(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보현리) 전투(9.2~5)
  • 호명리(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호명리) 전투(9.4~13)
  • 화산(경상북도 영천시 화산면 화산리) 전투(9.5~15)
  • 영천(경상북도 영천시) 전투(9.6~13)
  • 314 고지(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 오룡리) 전투(9.11~12)
  • 다부동(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방면 돌파(9.16~22)
  • 창녕(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영산(경상북도 창녕군 영산면) 방면 반격전(9.16~22)
  • 마산(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마산회원구 - 경상남도 진주시) 방면 반격전(9.16~23)
  • 신녕(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 경상북도 군위군 산성면 화본리) 방면 반격전(9.16~22)
  • 의성(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산리-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보현리-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경상북도 의성군) 방면 반격전(9.16~22)
  • 형산강(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효자동) 전투(9.16~22)

해군

  • 옥계(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해전(6.25)
  • 대한해협(부산광역시 앞바다) 해전(6.25)
  • 동해안(강원도 동해시 묵호 일대,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임원리 일대, 경상북도 포항시 해안 일대, 부산광역시 해안 일대) 봉쇄작전(6.25~7.13)
  • 옹진(황해남도 옹진군, 황해남도 강령군) 해상 철수 지원 작전(6.26)
  • 서해안(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 위도 일대,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 어청도 일대, 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 가의도리 옹도 일대, 충청남도 태안군 원북면 방갈리 안도 일대, 인천광역시 중구 북성동 월미도 일대,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 진리 덕적도 일대, 인천광역시 옹진군 연평면 연평도 일대) 봉쇄작전(7.5~14)
  • 구암산 지구(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죽장면 상사리 구암산, 경주시내,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상리 구룡산,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신광면 기일리 비학산,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죽장면 합덕리,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죽장면 정자리) 전투(7.11~17)
  • 평양(평양직할시) 및 해주(황해남도 해주시) 공습작전(7.3~4)
  • 원산(강원도 원산시) 정유공장 폭격작전(7.18~19)
  • X-Ray 첩보(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면 영흥도, 인천광역시, 경기도 수원시, 서울특별시) 수집 작전(8.16~9.14)
  • 덕적도(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 진리), 영흥도(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면 내리) 탈환작전(8.18~21)
  • 장사동(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상륙작전(9.14~20)

공군

  • 수도권(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경기도 의정부시, 경기도 동두천시, 경기도 포천시) 방어 항공지원 작전(6.25~27)
  • 전쟁 초기(한반도 상공) 제공 작전(6.27~30)
  • 미 제24사단 항공지원(경부선 및 강원도 원주시, 충청북도 진천군, 경기도 평택시) 작전(7.1~11)
  • 한국 공군 F-51 전투기 첫 출격(서울특별시, 경기도 시흥시, 경기도 안양시, 경기도 평택시,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강원도 춘천시, 강원도 원주시, 경기도 수원시, 경기도 이천시, 충청남도 천안시, 경기도 오산시)(7.3~11)
  • 북한군 전격전 저지(한반도 상공) 작전(7.10~24)
  • 흥남(함경남도 흥남구역) 화학단지 촉격작전(7.30~8.3)
  • 낙동강 방어작전시 후방차단(낙동강선~39도선(평양-원산)) 작전(8.2~9.6)
  • 낙동강 방어선(낙동강 방어선 일대) 근접 항공지원작전(8.5~9.12)
  • 북한 산업시설(평양직할시, 함경남도 흥남구역, 강원도 원산시, 함경북도 청진시, 함경북도 나진시) 전략 폭격작전(8.7~9.26)
  • 한국 공군 비행단의 낙동강 전선(낙동강 방어선 서남부 지역, 경상남도 통영시) 항공지원작전(8.15~9.22)
  • 인천 상륙작전(인천광역시) 항공지원(9.9~30)
  • 미 제8군 낙동강선(낙동강 방어선 일대) 반격작전 지원(9.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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